
[아바타]를 비판할 때 [원령공주], 그를 위시한 미야자키 하야오식 냉정한 자연관은 자주 모범답안처럼 호출된다.
[원령공주]는 자연과 문명의 충돌을 더 복합적으로 그렸고, [아바타]는 인간 문명을 악으로, 자연을 선으로 단순화했다는 식이다.
얼핏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원령공주]의 타타라 마을은 숲을 파괴하지만, 동시에 버려진 여성과 병자들에게 삶의 자리를 제공한다.
에보시는 숲의 적이지만 자기 공동체의 보호자이기도 하다. 반대로 숲 역시 무조건 자애로운 낙원이 아니다.
멧돼지신은 증오에 잠식되고, 늑대신들은 인간과 공존하려 하지 않으며, 시시가미의 숲은 아름답지만 인간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원령공주]가 위대한 이유는 인간 쪽에만 사정을 주어서가 아니라, 자연 쪽 역시 순백의 선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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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원령공주]야말로 [아바타]가 보여줬어야 할 더 성숙한 답이라고 말하는 순간 비교는 조금 이상해진다.
그 말은 때때로 이런 전제를 숨긴다. 인간 문명에도 사정이 있고, 자연은 무조건 아름답거나 자애롭지 않으며,
그 둘의 충돌을 이해해주는 이야기가 더 깊다는 전제다. 물론 이 전제는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
자연은 인간의 도덕 교과서가 아니고, 문명은 단순한 악의 발명품이 아니다.
인간은 먹고살아야 하고, 병든 자를 돌봐야 하며,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 [원령공주]는 바로 그 지점을 탁월하게 본다.
문제는 이 전제가 [아바타]를 평가할 때 너무 쉽게 “그러니 침탈자에게도 사정을 주어야 더 성숙하다”는 요구로 미끄러질 때다.

이때 ‘성숙함’이라는 말은 의외로 위험해진다. 성숙한 이야기는 언제나 양쪽 모두에게 사정을 주어야 하는가.
인간 문명의 이유를 길게 설명하고, 침탈자의 불가피성을 이해시키고, 자연의 잔혹함을 함께 보여줘야만 깊은 이야기인가.
그 기준 자체가 이미 인간의 사정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인간이 세계를 훼손할 때도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먼저 묻고, 그 사정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작품을 더 어른스럽다고 부른다.
반대로 어떤 작품이 침탈을 침탈이라고 단호하게 부르면, 그것은 곧 단순하고 유치한 선악 구도로 낮춰진다.
여기서 문제는 [아바타]가 복잡하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종류의 복잡함만을 성숙함으로 인정하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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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는 단지 “문명도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이유를 가진 문명이 어디까지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숨기지 않기 때문에 무겁다.
에보시가 시시가미의 목을 끊는 순간, 그녀는 단순한 개발자나 현실주의자를 넘어선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벌목이나 채굴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 그 자체를 절단하는 행위다.
인간에게 사정이 있다는 것과, 그 사정이 신의 목을 베는 행위까지 정당화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동시에 영화는 숲의 편도 완전히 무죄화하지 않는다.
증오에 먹힌 나고는 재앙이 되고, 모로와 산의 분노는 이해 가능하지만 화해를 향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령공주]의 회색은 양쪽을 대충 반반으로 만드는 회색이 아니라, 모두가 상처와 폭력을 품은 채 충돌하는 세계의 회색이다.

그런 면에서 에보시가 작중 철저하게 응징당하지 않는 결말은 애매한 불편함을 남긴다.
그녀는 팔 하나만 잃고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되며, 마지막에는 “좋은 마을을 다시 만들자”는 쪽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일차원적인 파멸이 오히려 더 납작할뿐이라고 말할수도 있겠다만 어딘가 불편한 지점이 분명 있다.
시시가미의 목을 베며 자연의 근원을 망가뜨린 인간은 죽지 않는다.

다만 [원령공주]의 답은 “용서받았으니 다시 시작하자”가 아니다.
누가 망가뜨렸든 지금 살릴 수 있는 자가 복원에 나서야 하고, 가까이하되 서로를 삼키지 않아야 하며, 금기를 넘은 자는 상실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상실은 공정한 법정처럼 배분되지 않는다. 시시가미의 목을 돌려주는 것은 에보시가 아니라 산과 아시타카이고,
가장 탐욕적인 지코보는 의외로 적은 대가만 치른다. [원령공주]의 결말은 완전한 속죄가 아니라 불완전한 복구다.

그래서 [원령공주]를 정말 진지하게 본다면, 그것을 단순히 “[아바타]보다 더 회색이라서 성숙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조심스러워진다.
[원령공주]의 핵심은 인간 문명도 이해받아야 한다는 안온한 균형감각이 아니다.
인간은 이유를 가진 채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금기를 넘을 수 있고, 자연은 신성하면서도 인간에게 자애롭지 않으며,
세계는 죄를 공정하게 배분하지 않는다는 불편함이다.
그 복잡함을 “문명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말로만 요약하는 순간, 오히려 [원령공주]의 날카로움은 무뎌진다.

반대로 [아바타]가 RDA에게 그런 관대함을 주지 않는 것은 미성숙해서가 아니다. RDA는 타타라 마을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타라 마을은 숲과 충돌하는 생존 공동체지만, RDA는 외부에서 들어와 판도라를 자원과 비용으로 계산하는 식민 기업이다.
그들의 윤리는 세계를 관계망으로 보지 않는다. 숲은 목재와 토지이고, 산은 광맥이며, 툴쿤은 암리타이고, 나비족의 삶은 개발을 방해하는 변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가격표가 붙는 순간 의미를 얻고, 가격이 붙지 않는 것은 제거 가능한 장애물이 된다.
[아바타]가 비판하는 것은 인간 문명 총체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존재를 상품·영토·물질·수명 연장 자원으로 환원하는 기업적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RDA를 굳이 에보시처럼 양가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얕음이라기보다 구분이다.
모든 문명이 타타라 마을은 아니다. 어떤 문명은 정말로 RD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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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관도 다르다. [원령공주]의 자연은 인간이 쉽게 속할 수 없는 신성한 타자다.
멧돼지신과 늑대신과 시시가미의 숲은 아름답지만, 인간을 품어주는 안전한 낙원이 아니다.

[아바타]는 그에 비하면 단순한 자연의 이상화나 낙원화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판도라 역시 약육강식의 위험한 세계이고, 그 위험은 영화가 반복해서 보여준다.

[아바타]가 자연을 바라보는 중심 언어는 잔혹함이나 약육강식이 아니라 연결이다.
나비족은 감각과 의례와 신경삭을 통해 판도라의 생명들과 관계를 맺고,
이크란과 툴쿤은 단순한 야생동물이나 탈것이 아니라 친족적 관계의 일부가 된다.
[아바타]의 자연은 인간이 멀리서 감상해야 할 낙원이 아니라, 인간중심적 소유 욕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관계망이다.
이 영화가 찬미하는 것은 “자연은 착하다”가 아니라, 세계를 자원으로 분해하지 않고 관계로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이다.
결국 두 작품의 차이는 성숙함의 우열이 아니다.
[원령공주]는 자연도 인간도 이미 상처와 폭력을 품은 세계에서, 죄 이후의 재건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아바타]는 공존의 비극으로 포장하기 전에, 진행 중인 침탈을 침탈이라고 불러야 하는 순간을 다룬다.
[원령공주]를 더 성숙한 자연관의 정답처럼 호출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두 작품을 모두 얕게 만들 수 있다.
[원령공주]는 자연의 신성만이 아니라 자연의 분노와 잔혹함도 본다.
[아바타]는 자연을 선하게만 봐서 단호한 것이 아니라,
어떤 침탈은 회색의 복잡함으로 이해되기 전에 먼저 침탈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사실을 붙든다.
인간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이야기가 언제나 더 깊은 것은 아니다.
때로 더 어려운 일은, 그 사정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